*이 글은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한 "플랫폼"지의 '인천은 있다' 코너에 2016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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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걷다 : 동인천 언덕길을 오르내린 30년, 그리고…


글,사진: 길다래


90년대,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버스를 타고 동인천으로 향했다. 일단 신포동에 내려 지하상가를 걸어서 구경하다보면 동인천에 도착했다. 지하상가에는 꽤 품질 좋은 옷이며 신발, 시계, 머리핀 등 없는 것이 없어서 몇 시간을 걸어도 지치는 줄 몰랐다. 교복에 책가방을 매고 동인천에 도착하면 여러 미용실 중 한 곳에서 머리를 자르고(자주 가던 곳은 ‘론론’과 ‘오렌지카운티’), 친구들과 스티커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친구들과 셀카를 찍고 맛있는 음식 인증샷을 찍지만, 그때만 해도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재미로 남기기 위해 천막으로 가려진 자판기에 3000원을 밀어 넣고 다양한 포즈와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자유공원 언덕길을 오르다 떡볶이를 사 먹기도 하고 인천 항구를 바라보며 공원 한 바퀴를 걷다보면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곤 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지갑 속 스티커사진을 다이어리에 옮겨 붙이고 잠에 들었다.

나는 지금 대한서림 아래 빵집에서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다. 지금은 흔한 체인점인 이곳은 대한서림이 생기기도 전에는 ‘별제과’였다. 70년대엔 ‘애관극장’이나 ‘인형극장’, ‘동방극장’을 가면 ‘별제과점’을 광고하는 영상을 틀었는데, 엄마 친구 삼촌이 빵 만드는 주방장이었단다. 친구들과 그 광고를 보며 “삼촌 나온다”며 낄낄대던 기억이 있단다. 대각선 왼쪽엔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여중생들이 빵을 먹으며 재잘대고 있다. 그 앞엔 커플이 기대어 앉았다. 건너편 건물 2층 ‘알토’라는 카페는 여전히 불이 켜 있다. 90년대에는 10대를 위해 개방된 카페가 2층 또는 3층에 많았다. 이것은 음악다방이 성행했던 70년대부터 이어진 동인천의 카페 문화였던 모양이다. 그 시절 만남의 장소는 카페가 아닌 빵집, ‘미락제과’나 ‘중앙제과’점, 다방과 ‘로젠켈러’, ‘성지’, ‘흑백다방’, 클래식 전담인 ‘벤다방’ 같은 음악다방 투성이었다. 삼치골목과 ‘대동학생백화점,’ 그 위로는 ‘신신분식’으로 연결된 동인천 언덕의 작은 사거리는 한 마디로 먹방골목. ‘만복당,’ ‘명물당,’ ‘맛나당’ 등에서 우동과 도나쓰, 설탕 묻힌 식빵 튀김을 팔았는데, 70년대 여고생에게 인기가 만점이어서 더 이상 만들지를 못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제물포고등학교, 인일여고, 인천여고, 기계공고 등이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동인천은 학생을 위해 세워진 소도시였다.

할아버지 한 분이 빵 봉지를 들고 내 앞에 앉았다. 안경을 끼고 통유리 창문을 통해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신식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역 앞에서 한숨 쉬어가는 몸짓은 아주 자연스럽다. 사람의 이동이 많은 곳은 그렇다. 변화에 민감하며 역사에 등 돌리지 않는 그런 연세 많은 분의 의연함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허름한 건물로 비어 있고 어느새 오래된 시계탑도 사라진 동인천역, 그때는 ‘인천백화점’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예쁜 새 옷을 사러 갔던 기억이 난다. 83년생인 나에게는 아주 흐릿한 꼬마 때의 기억이다.

동인천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넘어간다. 자유공원에서 동인천으로 내려가는 언덕길로 언니와 탁구장을 다녔다. 자갈 박힌, 휑하게 반질거리던 시멘트바닥 위에 탁구대가 층마다 3대는 있어서, 나는 언니와 같은 편을 먹고 나이대가 같은 남자 친구들과 탁구 경쟁을 벌였다. 그 위로는 남자 어른들을 위한 기원이 있었다. 지금도 신포동에는 기원이 한 곳 남아 있다. 아이들은 동인천에서 놀고 신포동에는 어른들이 우아하게 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을 동경하며 만들어지는 것일까? 현재는 너무도 달라진 신포동에 대한 동경은 30대인 지금도 남아 있다. 어쨌든, 어린 날 미술을 시작해서 화실을 다녔기에 ‘대동화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새로 나온 물감이며 붓을 사고, 덤으로 연예인 사진을 책받침으로 코팅해서 들고 나오기도 했다. 나오는 길엔 빨간 양념이 칠해진 떡꼬치를 물고 들었다. 이 화방은 지금도 남아 있는 ‘대동학생백화점’의 한 코너에 있었는데 두 눈에 쌍꺼풀이 진 동그랗고 귀여운 언니가 한동안 카운터를 보았다. 서울에서도 귀한 메이커의 물감들이 다양했다. 같은 화실 언니들에게 정보를 얻어 수시로 사서 모아 화구통에 넣었다. 이곳은 62년에 처음 문을 열어 현재 2대째 운영되는 곳이다. 신식 물건이 가득한 종합상가는 학생들에게 신문화의 접점과도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조금 위로 올라가면 ‘선화랑’이 있다. 미술 작품을 위한 액자를 맞춤으로 만드는 곳인데, 80년대 중반에 인사동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조금 더 윗자리에 세를 얻어 시작하여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80년도부터 동인천에는 예술가의 작업실과 화실이 즐비했던 모양이다. ‘내리교회’에서 동인천으로 꺾어 들어가는 어귀에는 ‘점화랑’이 있고 신흥초등학교 건너편에도 표구사가 남아 있다. 중구에는 아직도 예술가들이 많은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인 80?90년대에는 인천대, 홍익대, 서울대를 나온 젊은 화실 선생님들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지금은 교수, 화가, 그 외에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 몸담고 있을 것이다.

젊은이의 거리 동인천엔 그 시절 노래방이 없었다. PC방이 아닌 오락실이 있었고 친목을 위해 가볍게 몸을 쓰는 탁구나 볼링, 잔입거리를 충족시킬 맛있는 분식이 넘쳐흘렀다. 대학생은 삼치를 벗 삼아 술 한 잔을 했다. 우연한 만남과 대화, 이유 모를 헤어짐과 엇갈림, 서울로 오르는 빠른 길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인천역은 ‘하인천역’이었다. 동인천보다 작고 아담해서 하인천이란 이름이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인천을 대표하는 종점이 되고, 인천은 서울에서 걸음하기에 너무도 먼 곳이 되었다.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인천우체국 건너편 주민센터 자리의 중구청이 시청 자리로 옮겨지고, 구월동에 백화점이 생기면서 신포동도 활기를 잃었다. 지금은 부촌에나 있을 법한 걷기 좋은 로드매장이 성행했던 시절을 지나 신포동의 고급스러운 부띠끄, 테일러점, 슈즈살롱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사람과 문화를 형성하는 상점이며 그 거리다. 상점은 돈의 흐름에 따라 생겨나고 이동한다. 새로운 문화권의 형성과 사라짐으로 가게는 문을 열고 닫는다. 사람도 모이고 흩어진다. 그렇게 공간이 채워지고 어느 날 거리는 홀연히 비워져버린다. 그럼에도 세대를 넘어 남 아있는 몇몇의 부띠끄와 문구점, 서점과 분식점, 카페가 흔적처럼 존재한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자리를 지키며 모든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을까? 내리교회의 아펜젤러관이 건립된 자리엔 작은 주택들이 많았고 그 앞은 소소한 카페거리였다. ‘뉴욕뉴욕’의 지하 카페 간판과 독특한 인테리어가 남아 있는 곳을 사무실로 사용하는 동인천과 신포동을 잇는 ‘뒷골목’은 전부 사라지고 큰 빌딩과 교회 건물이 들어섰다. 건물을 지으려고 작은 문화를 없애고 공사를 위해 거리를 막아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 그 곳은 황폐화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전의 문화가 아닌 또 다른 시대의 낯선 문화가 형성된다.

서울의 시내버스 안에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현장을 라디오 생중계로 들으며 마음 졸이던 생각이 난다. 나는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고, 사실은 구도심의 이동을 눈으로 체감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인천으로 내려와 중학교 동창생을 동인천에서 보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러나 친구는 ‘더 이상 우리는 여기서 놀지 않는다’고 하며 “요즘은 주안이나 구월동이 좋아”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중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늘 보던, 정감 어린 동인천과 세련된 신포동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인천여고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시절 연수동으로 이전하였고 이어서 축현학교도 옮겨갔다. 그렇게 학생들이 적어지고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거나 술집으로 변모하였다. 순진한 놀이문화는 술과 담배로 이어진 모양이다. 청소년이 거칠어지고 놀이문화는 상업적인 수단으로 활용되는 듯 보였다. 동인천 길거리는 사나워졌고, 밤은 남녀 아이들이 술을 마시고 취한 소리로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 어두운 동내가 불탔다. 한 호프집이 아이들을 불로 삼켜버린 것이다. 그날 밤 내가 탄 버스 안 라디오는 그 모습을 생중계했고 서울 신촌 한복판에서 운전사는 볼륨을 높였다. 모두들 웅성거렸다. 내 고향의 무서운 모습에 나는 두 손을 붙잡고 오랜 시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긴 시간 신포동은 텅 비워지고, 동인천의 상권은 사라나질 못한 것 같다. 2008년 대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동인천에서 신포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중턱에 작업실을 얻었다. 차 한 대가 돌아다니질 않았다. 지나치게 한가로이 식사를 했고, 드문드문 열린 오래된 상점은 나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딘가 쇠퇴한 느낌의 소도시가 덩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러한 황량함이 아찔했다. 나는 너무 좋은 시절을 지나쳐온 것이다. 도시는 이동하면 그만인 것일까. 변화에는 적응하고 기억은 잊으면 되는 것일까.

2016년이 시작되었다. 동인천역은 새로움을 준비 중이고, 새롭게 변모한 문화와 오래 쌓인 역사, 관광과 인천 음식으로 인파가 몰려든다. 처음 살아서 겪는, 사람이 사는 세상은 오늘도 어딘가로 열심이다.



2016년 겨울,



길다래


#저자 약력
1983년 인천 생. 서울과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작업하였다. 글쓰기와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오브제를 만들고 어떠한 공간에 설치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한 신선한 전시, 사운드 퍼포먼스 기획에 관심이있다.
emeraldme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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