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서울문화재단의 시각예술분야 개인전시 지원으로 진행된 '인천풍경'의 전시서문입니다.
토끼 타인 도시 나 풍경
김홍기 / 미술평론가
길다래는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또한 풍경을 쓰고 읽는다. 그에게 풍경은 그려야 할 꼴일 뿐만 아니라 써야 할 글이며 읊어야 할 말인 것이다. 그렇게 꼴, 글, 말이 함께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그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드로잉과 회화뿐만 아니라 텍스트, 비디오이미지, 사운드, 목소리까지 동원하는 까닭이다. 그는 이 복합적인 풍경을 ‘인천풍경’이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인천은 우리나라 중서부, 황해에 접하여 있는 광역시, 인구 300만 이상의 대도시로 정의된다. 그러나 작가의 개인적 관점에서 인천은 가족이 삶을 일군 장소,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장소, 서울과 프랑스를 거쳐서 다시 되돌아간 장소, 오늘의 그가 살아가고 작업하며 사람들과 마주치는 장소이다. 작가가 조금 더 관심을 두는 쪽은 역시 후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인천’은 지리적이고 행정적인 영토에 그치지 않고 주관적인 감정과 기억의 집합이기도 하다. 구획된 물리적 장소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특정한 심리적 상태를 함축하는 것이다. 즉 길다래에게 ‘인천’이란 명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형용사인 것이다. ‘인천풍경’은 ‘인천(의) 풍경’이면서 또한 ‘인천(적인) 풍경’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천’의 이중적 용법은 길다래의 이전 작업들에서도 보였던 것이다. 그가 2015년 유광식과 함께 2인전을 열면서 펴낸 {인천수첩}이라는 책에서의 ‘인천’도 그렇고, 2017년 함정식과 함께 열었던 2인전 <인천사람>에서의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엮은 수첩과 그가 바라본 사람을 수식하는 ‘인천’이라는 지명은 늘 공간적 좌표보다는 정서적 기표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길다래가 영화감독 장률과 동인천 부근을 산책하며 나눈 대화를 {인천산책}이라는 소책자로 엮어서 낸 것은 매우 납득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장률은 <중경>(2007), <경주>(2013)를 비롯해 최근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까지 도시명을 영화 제목으로 즐겨 사용함으로써 지명에 정서적 색채를 강화하는 행보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장률의 ‘경주’와 길다래의 ‘인천’은 모두 지도상의 평면으로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심리적 요철을 지닌다.
길다래의 인천은 지리적으로 말하면 연안부두 부근에서 동인천까지 닿아 있는 특정한 구역이다. 이 곳은 이른바 인천의 원도심으로서 지금은 어시장이나 차이나타운이 주말 나들이 코스로 여겨질 뿐 실제 주민은 점점 줄어드는 퇴락의 장소이다. 길다래는 항만업과 수산업이 왕성했던 시절에 이 곳에서 동광철공소의 막내딸로 유년기를 보냈다. 도시는 기울어 가고 기억은 저물어 간다. 길다래의 ‘인천풍경’은 그런 도시의 그런 기억을 보여준다. 유년시절부터 최근까지 이 지역에 관한 사적인 기억의 단편을 엮은 {연안부두 랩소디}는 텍스트로 그려낸 ‘인천풍경’이다. 짧고 담백한 텍스트들은 언어로 쓱쓱 그린 드로잉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연안부두 부근의 장미나 버드나무를 그린 드로잉들은 종이에 이미지로 써내려간 단편처럼 여겨진다. 기울어 가고 저물어 가는 퇴락의 정조는 애초에 그 지역이 바다를 메워서 만든 매립지라는 사실에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 건축에 앞서는 매립, 탄생에 앞서는 매장은 유한한 도시와 인간의 운명을 예고하는 신탁인지도 모른다. 길다래가 그린 매립지의 풍경이 꽤나 쓸쓸한 까닭이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길다래의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정서와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미와 버드나무는 연안부두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딸들의 아버지가 동광철공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곧바로 굴절 없이 타인에게 도착할 수는 없다. 결국 작가가 지각하고 기억하는 주관적인 풍경이 더욱 보편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복수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이 마련되어야 한다. 길다래가 지금껏 인천을 테마로 삼아서 해온 여러 작업들이 타인과의 대화와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광식과 만든 {인천수첩}이 그러했고, 함정식과 살펴본 <인천사람>이 그러했고, 장률과 함께 거닌 {인천산책}이 그러했다. 그는 이처럼 타인과의 협업을 통해서 인천이라는 장소와 정서를 입체화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 <인천풍경>은 개인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전시에는 여러 타인들이 함께한다. 그에게 전달된 친구의 쪽지나 편지, 그의 작업에 대한 친구의 진솔한 코멘트, 이 항구도시에서 맺은 특별한 관계의 시작이었던 청첩장 등이 액자 안에 담겨 길다래의 작업들과 나란히 전시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과거 비디오작업 <낭독영상1>(2016)이나 <걷는 시>(2017)가 오로지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낭독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비디오작업 <낭독영상2: 인천풍경>은 두 명의 친구에게 목소리의 권리를 넘겨준다. 그리고 낭독의 텍스트도 길다래의 것이 아니다. 친구들은 단지 목소리만 빌려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천에 대한 인상과 기억을 직접 써서 제 목소리로 낭독한다. 더불어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윤동주 등의 텍스트도 함께 낭독되어 인천이라는 정서는 여러 각도와 범위에서 입체화된다. 그리고 길다래는 이 두 명의 친구를 그려 스크린 옆에 놓아둠으로써 그들의 목소리에 작가의 제스처로 화답한다. 이 비디오작업에서도 퇴락의 정서는 짙게 표현되어 있다.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비밀스러운 지하묘지인 카타콤을 떠올리기도 하며, 다람쥐의 죽음을 기억하기도 하며,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을 낭독하기도 한다.
이 전시의 협업자가 길다래의 지인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작가는 집에서 키우는 토끼로 하여금 나름의 ‘인천풍경’을 그리고 말하게 한다. 비디오작업 <토끼 소나타>를 보면 토끼가 글을 읽는 방식은 그 글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이다. 토끼는 그림과 사진도 가리지 않고 갉아 먹는다. 이렇게 군데군데 사라진 텍스트와 이미지들은 전시의 ‘인천풍경’과 공명을 일으킨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원도심의 풍경, 서서히 앙상해지는 장소의 기억에 대한 시각적 은유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토끼의 행동이 전적으로 향수와 회한만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코를 벌름거리면서 끄떡도 안 하는 쇠창살을 갉아대는 등 집요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퇴락의 정조 속에서도 끝내 버티고 복작거리며 자신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자꾸 말하는 듯하다.
길다래는 아마도 토끼의 집요함에서 작가 자신의 끈기와 비슷한 무언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는 윤동주의 말처럼, 길다래도 다시 인천의 풍경을 그리고 쓰고 읊으며,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역시 ‘인천풍경’의 한 조각이 된다. 도시는 기울어 가고 기억은 저물어 간다. 그러나 연안부두 앞바다는 도시의 영락에 아랑곳없이 끈질기게 출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