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5년 진행된 전시이자 출판된 책 '인천수첩 . 두 각을 이루는 곡선'을 위한 비평글입니다.




두 곡선이 만들어내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오마주


박석태(미술비평)


그들, 닮음

돌아보면 그들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그리 차이 나지 않는 그들의 ‘생물학적 나이’는 어쩌면 다르다는 의미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부분일지 모른다. 흥미롭게도, 혹은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이 ‘닮아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의 공간적 배경을 공유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공간적 배경이란 인천이라는 하나의 도시로 치환된다. 인, 천, 이라는 고유명사는 그들 각자에게 하나인 동시에 사뭇 다른 공간의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구체적이고 특정한 공간을 의미하는 고유명사 인천은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감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공통의 이름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들의 인천은 사람들의 ‘진정한’ 삶이 유보된 송도와 청라와 같은 마천루의 신기루는 아니다. 누구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 심지어 자주 외면받기조차 하는 오래되고 낡은 거리가 그들이 공유하는 인천이며, 그곳은 삶의 구체적인 현현체로 상정된다. 그들의, 그리고 타인의 삶은 거기에서 오늘도 이어진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각자의 인천이 존재하므로 인천은 그들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로 설정된다. 매일 매일이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곳. 그곳을 이루는 좁다란 길과 담장, 낮은 언덕, 그리고 헐리고 다시 세워지는 건물들은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다. 아니, 이 모든 것들의 변화보다 어쩌면 그 속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이 그들이 바라보는 변화의 핵심일 것이다.

산보의 시간이 곧 ‘유쾌한 몽상’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처럼 유광식과 길다래 두 사람은 도시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걷고 대화하며 사유했다. 다만 루소가 자연과 일치되어 가는 삶을 원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이 도시와 대화하고 관찰하는 가운데 스스로 일부가 되어 가고자 하는 모습이 다를 뿐이다.
소요하듯 걷는 느린 발걸음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결코 빠르지 않게 느릿느릿 걸으며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할 것. 이번 전시는 그러한 스스로의 강령에 대한 잠시의 멈춤이라고 해두자. 어느 책의 제목처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과정이므로 이 전시는 그들의 사유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비록 ‘전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오브제로서의 전시 작품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닌 일련의 사유의 흔적들을 공유하는, ‘전시’와 ‘제시’의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최소한의 물질로 사진과 오브제는 존재한다. 허나 여기에서의 사진과 오브제는 그 자체를 지시하는 미적 자율성의 영역 안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들의 축적된 시간과 경험을 드러내는 기호로 기능하여 보는 이의 감각적 영역에 침투하도록 의도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공통의 공간에서 출발한 미세한 감각의 차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변곡점

이쯤 되면 그들의 ‘닮음’은 달리 말하자면 결국 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들이 닮아 있다는 언설 이면에는 둘 사이의 차이를 좁히려는 긴밀한 공동의 목표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은 같은 길과 골목을 걷고,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적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꼭짓점을 향해 모이지는 않았을 법하다. 때로는 아주 가볍게 휘발되어 버리는 이야기도 그들에게는 성장의 자양분을 이루는 요소로 작용했다. 도시에 대해,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해 간간이, 가볍게 나누는 의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사유는 발효되어 각자의 방식으로 성숙되어 갔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앞에서도 전술했듯이 오브제의 견고한 완성이라는 전형적인 방식을 유보한 채 소요(逍遙)를 통해 얻어진 사유(思惟)의 현재진행형을 보여주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는 비유컨대 자유로운 두 개의 곡선이 만나 이루는 각(angle)과 같다. 곡선은 비정형이므로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변할지, 무엇을 닮으려 할지, 또 다른 곡선을 만나 어떠한 각을 만들어낼지 불명확하다. 길다래와 유광식이라는 두 곡선이 자유롭고 느슨한 연대의식에서 출발하여 만들어내는 각이 예각일지 둔각일지, 혹은 따로 놓여 결코 맞닿지 않는 곡선일지는 예상할 수 없다. 마침내 두 곡선이 만나 만들어내는 변곡점일지,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것이 둘의 행보에도 진정한 변곡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예상은 불필요할지 모른다. 분명한 건 두 작가가 어떠한 각을 만들어내든 그들이 겨냥하는 문제의식은 현재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이처럼 공동의 소요와 사유를 통해 하나둘씩 건져 올린 일단의 문제의식은 각자의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해결 방안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는 점인데, 그들은 정주하는 도시의 모습을 스스로 규정짓지 않고 관람자와 함께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전시가 갖는 미덕으로, 하나의 공간에 느슨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사진과 설치물은 내밀한 기억의 고리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고리의 한쪽에는 두 곡선(작가)이 위치하며, 다른 한쪽은 또 다른 자유곡선(관람자)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두 사람이 그랬듯 관람자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이 도시, 그리고 그 속의 삶에 대해 하릴없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궁구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의미의 순환고리가 완성된다.

관찰의 시선

유광식은 예의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가 마주한 그곳과 그때를 기록한다. 심상하게 보이는 흔한 풍경과 장면들 사이마다 느껴지는 서걱거리는 예민한 감수성은 도시의 관찰자로서의 면모를 무시로 내보인다. 길다래 역시 그녀만의 특유의 알레고리를 담은 글과 결합된 드로잉을 제시함으로써 소요자로서의 작가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들에게 이 오래된 도시를 이루는 골목과 거리는 삶과 결합하여 작은 식물원이 되기도 하고, 은유가 가득 담긴 구조물이 되기도 하며, 날것의 모습으로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기기도 하고, 남다른 감각으로 ‘발견’한 또 다른 맥락의 의미가 스며있기도 하며, 이방인과 같은 관찰자로서의 냉정함이 공존한다.
규격화된 전시장의 견고함에서 탈피한 그들의 전시 방식은 그대로 오래된 이 도시를 닮아 있다(실제로 전시가 열리는 공간은 원도심에 위치해 있다). 그 공간 속에 놓인 두 곡선이 만들어내는 느릿한 움직임을 느끼는 것, 작은 공간을 천천히 떠다니듯 거니는 것, 그리하여 그들처럼 이 도시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곳을 지나갔던 것들에 대한 오마주다.



2015년 6월 3일